총 게시물 10건, 최근 0 건
   
손양원목사의 순교신앙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
글쓴이 : 최고… 날짜 : 2012-05-10 (목) 10:52 조회 : 1112
 
 
여수삼광교회 담임목사 윤 수 현

 지난 10월4일부터 8일까지 5일 동안 그동안 음지에 묻혀있던 손양원목사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자고 여수시내의 400여 교회가 마음을 모았다. 그분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이 땅에 복음화의 물결이 출렁이게 하자는 것이 그 뜻이었다. 그리고 기대해 본다. 18세기 영국을 변화시켰던 요한 웨슬레가 자신이 신학을 세워서 정립하지 않고 후세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그의 신학이 정립되었던 것처럼 아마도 손양원목사의 신학도 이제부터 재발견되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나는 이번을 기회로 그분의 순교정신이 우리 한국교회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짧은 지면이나마 상고해 보았다.

1. 성장지상주의의 한국교회에 내실에 찬 순교정신을 심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장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달려왔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큰 맘모스교회가 우리 한국에 있으며 각 교단별로 세계적인 교회들이 우리 한국내에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렇게 성장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췄고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자가진단 속에서 역기능적 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진정한 교회성장은 성숙이다. 성숙은 곧 정신이어야 한다. 영혼이 잘되는 것 그것이 성숙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숙보다는 교회의 외모적 성장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왔다. 얼마나 성숙한 교회냐? 얼마나 건강한 교회냐? 보다는 얼마나 성장한 교회냐? 교세가 얼마나 되느냐?에만 관심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지금 여기서 성숙을 강조한다고 해서 성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성장과 성숙이 균형을 이루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손양원목사의 순교정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성숙의 영양분을 공급해줄 좋은 신앙유산이요 정신적 지주이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의 사표가 되어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그분의 신앙순결, 용서와 사랑, 목양일념, 그리고 순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그분의 생애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1년6개월의 형을 살고 난 후 서기가 그를 석방해 주기 위해서 검사에게 이제 그의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변호해줄 때 그는 그 즉시 그 말을 시정하여 신사참배 거부의 의지를 확실히 밝혔던 신앙순결자였으며 정통신앙의 수호자였다. 자기의 두 아들이 순교를 당하자 오히려 감사의 조건 10가지를 내세워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드렸다는 일화는 목사님들의 설교중에 한번쯤은 예화로 사용되어졌을 감사의 신앙, 그리고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가 잡혔다는 말을 듣고 그의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불쌍해서 어쩌나?를 연발했던 그분의 숭고한 영혼사랑, 그리고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기의 아들로 삼는 용서와 사랑, 6.25 당시 성도들이 목사님을 피난가도록 그토록 요청했건만 양들을 두고 자기만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기필코 양들 곁에서 함께 있다가 결국 순교당하신 그분의 생애 앞에서 무뤂을 꿇지 않을 수가 있던가? 그리고 그분을 본받고 싶어하지 않을 목회자가 누구이겠는가?

 실제로 애양원을 찾는 순례객들이 1년이면 3,4만명(손동희권사의 증언은 4만여명, 애양원교회는 3만여명), 매월 수천명에 이르는 순례객들은 손목사의 순교기념관, 그리고 동도섬에 위치한 3부자의 묘지 앞에서 신앙의 옷깃을 여미고 간다. 그들이 남기고 간 방명록의 통계(이광일, 손양원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의하면 믿음의 도전을 받았다는 사람이 45%, 순교신앙 및 손양원목사를 본받겠다는 사람이 50%, 참사랑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사람이 3%, 기타가 2%이다. 특별히 그 중에는 불신자가 이곳에 왔다가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손양원목사의 신행일치 순교신앙이 한국교회의 신앙적 성숙에 얼마나 큰 지주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2. 모범적 전도자로서 한국교회 성장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자기의 신앙을 지키는 것,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그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안재선이를 용서하는 등의 개인적 신앙과 경건생활뿐만 아니라 복음전도에 자기의 일생을 바쳤다.

바울이 아그립바왕이나 베스도, 벨릭스 총독 앞에서 심문하는 그들에게 오히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하면서 전도했던 것처럼 손목사도 그랬다. 천황폐하를 신으로 받아드리지 않고 신사참배를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만이 유일신이요 예수만이 속죄주인 것을 전하는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물론 그러한 증언이 자기의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되어진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심문하는 검사를 전도하고자 하는 뜨거운 영혼구원의 열정때문이었다. 그가 1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난 후 항고를 한 적이 있는데 그후 그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항고한 것은 재판이 잘못되었거나 1년6개월 감옥살이하는 것이 싫어서 불평의 감정을 나타내거나 벌을 면해보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한번 더 재판을 받게 되면 재판정에 가서 기독교 진리를 더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으므로 항고한 것이니 아버지, '저놈이 감옥살이하기가 싫으니까 구차스런 항고까지 했다'고 생각지 말아주세요"하며 그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다. 그의 전도는 옥중에서도 그치지 않음으로 인하여 결국 독방으로 옮겨지기까지 했다.

그는 1926년 3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한 후 부산 감만동교회 교회의 외지전도사로 부임한 이래 밀양수산, 울산방어진, 울산남창, 부산감만동, 부산남부민, 양산원동교회등을 개척하였다. 또한 그는 이미 1938년 9월 9일 저녁 8시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예수교 장로회 총회 27회 회의중에 결의되어진 신사참배를 반대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시찰회에서 순회전도비를 지불하지 않고 결국 그를 면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양산, 김해, 함안지역을 다니면서 전도를 쉬지않았다.

이러한 손목사의 삶을 계승하기 위하여 애양원교회는 계속 전도에 힘을 쏟아왔는데 그들은 거의 모두가 건강치 못하여 "가지 못하거든 보내는 선교사가 되자"라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소중한 물질을 쏟아서 지금까지 33개의 교회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이광일, 손양원목사의 생애와사상). 그리고 성서암송반 식구들 소수가 헌신하며 출발했던 모임이 '떨기나무 선교회'를 거쳐 지금은 교외적인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 선교회'로 발전되어 교회개척 및 해외선교, 북한선교에 앞장을 서고 있다.

3. 민족정신과 희생정신의 간접전도로 교회성장을 도모했다.

  현대 그리스도인이 전도하는데 있어서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불신자들의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가슴아픈 현실이다. 신자는 불신자에게 있어서 걸어다니는 성서라는 말이 있듯이 신자는 불신자들에게 아름다운 본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특별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직접전도의 효과가 많이 약화되어간다는 점에서 바라볼 때 손목사의 사랑과 용서의 삶은 많은 불신자들까지도 감명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손목사는 직접전도자로서 엑기스적인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선교, 나환자 보호등을 통한 간접전도도 병행하였다. 그는 소시적 일본에 건너가 동양선교회에서 하는 노방전도에 동참하여 북을 메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열성적 전도자였으며, 감옥에서, 교회에서, 부흥회에서 그는 유일신 하나님, 속죄주 예수 그리스도의 엑기스적 복음을 전하며 회개를 강조하였지만 그는 직접전도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일찌기 아버지 손종일장로의 3.1만세운동 가담으로 인하여 서울중동학교에서 퇴학을 당하는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경력을 가지고 나라를 잃은 동족들의 곁에서 함께 아파하고 저항하면서 현실속의 민족애적 정신을 고수하였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시어 우리 인류의 친구로 오셨던 것처럼 손목사는 고결한 경건주의자로서 은둔해있지 아니하고 민족주의자로서 동족들과 함께 고통을 겪었다.

당시 1919년의 3.1운동이 조국의 광복을 이루지 못한데 대해 1920년대의 한국교회는 타계주의 신앙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목사등이 새하늘과 새땅을 강조하면서 '예수믿고 천국간다'는 내세지향적 신앙으로 나가게 되었다. 1930년, 40년대까지 일제의 압제 밑에서의 박해와 50년대의 6.25사변으로 인한 민족적 혼란등으로 더욱더 이러한 타계주의적 신앙은 한국교회에 팽배했다.

이러한 때에 손목사는 소위 하늘나라의 영광과 이 땅의 생활자체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융합하려는 일원론적인 하나남나라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기독교신앙"이라는 글에서 "현재를 업수이 여기고 장래의 광명을 안전(眼前)에 보는 소망, 이것도 신앙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현실속의 민족애적 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애양원에서는 매년 한차례씩 경노잔치를 벌인다(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 이 잔치는 손목사가 애양원에 온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92년말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 인구가 13,700,000명, 천주교는 3,500,000명으로 집계되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하면 우리나라 4천3백만 인구 가운데 기독교 신자는 무려 17,200,000명이 된다. 이 수치는 전국민의 40%에 이르는 수치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발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소홀히 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대사회적인 프로그램, 즉 사회에 대한 관심도와 공헌도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부족했음을 우리는 솔직히 자인해야 한다. 그런데 손목사는 벌써부터 대사회적인 관심을 갖고 경노잔치를 베풀어 어른을 공경함으로 간접전도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나환자의 친구가 되어 가족들보다도 나환자들 곁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냄으로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허전함을 억눌려야 하는 안타까움을 머금고 자랐다. 특별히 그는 나병원 14호실(중환자실)에 있기를 즐겨 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고, 심지어는 나병의 환부에 사람의 침이 약이 된다고 하여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 "손목사님, 저러다가 정말 우리처럼 문둥병에 걸리시는 건 아닐까?"하고 염려들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손목사는 "차라리 내가 나병에 걸렸으면 오죽 좋겠나..."하면서 오히려 성육신적 정신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랑의 성자이었다.

4. 그의 수용정신은 한국교회의 갈등에 화해를 심었다.

  손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신앙적 순결을 지킴으로 인하여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하나님이 숨겨놓은 7천의 의인들이 있었다(왕상19:18). 그런데 문제는 해방이후 지난날의 변절자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때 재건파가 탄생되었는데 그들은 지난날 신사참배한 교회나 목사, 성도들을 용납하지 않고 마귀당이라고 몰아세우며 정죄했다. 그러므로 해방이후 교회가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그러나 손목사는 수용주의의 입장에 섰다. 진리를 거절하는 이단은 수용할 수 없어도 일시적으로 배도한 후 회개하고 돌아오는 형제는 받아야 하는 것이 교회사적 교훈이요 성경의 진리이다. 탕자를 받아드렸던 아버지의 심정으로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 보살핀 사건은 그의 이러한 입장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

몇년전,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탬풀턴상을 수상한 한경직목사가 수상소감을 말할 때 "나는 신사참배자입니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신사참배자입니다"라고 고백했는데 만약에 해방후 한경직목사와 같은 분을 '순결'이라는 이름으로 처단했다면 한국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그런분이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결론적으로 손양원목사의 생애는 그의 개인생애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성숙의 정신적 푯대요, 교회성장의 밑거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원론적인 생각속에서 쉽게 선과 악을 흑백의 논리로 단정지어 배척하는 한국교회의 전도방법에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있어서는 그토록 철저한 신앙적 순결을 고수했던 경건자였다. 또한 교권장악과 교회의 순결이라는 미명아래 분열을 너무나 쉽게 여기는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에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 부흥은 바로 이 손양원목사와 같은 순교자의 피를 먹고 이루어졌다. 손양원목사를 한국에 보내주신 하나님, 그중에서도 최남단 소외된 작은 도시 여수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분의 숨결을 지척에서 느끼면서 목회하고 있다는 행복감을 고백하며 글을 맺는다.